치의예과 2학년 2학기 정도 되면 정체성에 혼란이 조금 옵니다. 자연대학 소속이라 아예 학교 병원과도 떨어져 있고 다른 생물학과 화학과 학생들과 옆반을 쓰며 일반적인 자연과학을 배우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그리고 교양수업시간은 전과가 모이는 곳에서 수업을 받기에 실상 치과의사가 되기 위하여 치대에 들어왔지만 약 2년간은치대 동아리 연습과 기타 행사를 제외하곤 치과병원이 있는 치과대학에 갈일은 많지 않습니다. 선배들이나 교수님을 마주쳐도 어색하기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부러 그곳에 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과 2학년 2학기가 되면 치의학 개론이라는 수업을 배웁니다. 이는 곧 치과대학에 들어올 학생들을 위하여 각과별로 교수님들이 전반적인 과에서 배우는 내용들을 슬라이드나 파워 포인트를 이용하여 일주일에 2시간 정도 앞으로 4년간 배울 내용의 개론과 각 과별로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전반적으로 알아보는 수업이라 크게 부담은 없지만 앞으로 다가올 호기심과 기대감에 꾀나 집중했던 수업이었습니다. 추석이 지난 금요일 우리는 구강악안면외과 개론을 듣기 위해 치의학 강당에 모였습니다. 이날은 구강악안면외과 과장님이 직접 예과 학생들에게 수업을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 키가 크진 않지만 하얀 피부에 날렵한 외모 얼굴이 웬만한 여자보다 작아서 어려보이지 않기 위해 어색하게 쓴 큰 금테 안경 말투나 행동 모든것이 굉장히 차갑지만 이지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우리 나라도 귀족 사회였으면 저런분이 귀족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우아함이 느껴지시는 분이었습니다.
교수님이 구강외과에 관해서 한장 한장 보여주는 슬라이드는 전공의 시절부터 담당하셨던 작게는 사랑니 발치, 임플란트 수술, 구순구개열 수술, 외상 환자, 마지막으로 그 범위가 가늠이 안되는 구강암 수술까지 모든것이 놀랍게 느껴졌습니다. 과연 치과의사가 저런 수술까지 할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어쩌면 비록 입시에서 떨어졌지만 꿈이었던 의대에서의 생활을 치대에서도 펼칠 수 있는 기대감이 감도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렇게 두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우리는 늘 그렇듯 수업이 끝나고 두명씩 편을 먹고 네명이서 학교 식당근처에 있는 당구장으로 향했습니다. 당구를 치다말고 저는 친구들에게 아마도 나는 오늘 운명적인 수업을 들은 것 같다. 꼭 구강외과를 수련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선포하듯 말했고 흥분되는 감정을 조금은 주체 못하고 친구들과 맥주집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교수님과 2시간의 수업을 인연으로 본과 2학년 3학년 4학년 구강외과 수업을 나름 열심히 공부했고 물론 학점은 좋지 않았지만 즐겁게 수업을 들었습니다. 사실 구강외과라는 교과만 정했을뿐 수련 병원은 학교 병원도 있었지만 졸업후 외부로 나가서 좀 자유롭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결국 처음 그 느낌 그대로 학교 병원에서 수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구강외과 지원하는 픽스 인턴으로 확정되고 교수님 두분과 전공할 인턴 3명이서 기념으로 시내 고기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좀처럼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교수님인데 그날은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이셨고 거하게 먹고 술도 같이 마신후 식당앞 주차장에서 제 볼에 뽀뽀를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든든한 전공의 들이 들어와서 너무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상 다른 보통 사람들이 남자볼에 그런 행위를 해도 놀란텐데 정말 상상도 안되시게 점잖고 차가운 분이 그렇게 해주셔서 너무 놀랐습니다. 너무 격하게 환영해주셔서 감사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국시를 보고 합격의 기쁨도 잠시 험난한 수련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접하는 수술준비와 병동생활 너무 힘든 일정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교수님은 늘 그렇듯 많지 않은 말씀속에 핵심 단어 몇 마디만 하시고 대화나 행동에서 사족은 거의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감정이 풍부하고 사람과 교감하기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상당히 대면하기가 쉽지 않은 성향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떤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간단 명료 했으며 항상 일을 접근할때 굉장히 냉정하고 차갑게 접근했습니다. 저는 교수님과 함께 하는 과정속에서 과한것을 덜어내는 연습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일년이 지나고 제 밑으로 인턴이 들어왔습니다. 저도 밑에 년차가 들어와서 너무 기뻣고 새벽부터 시작된 일과가 밤늦은 새벽 1시 30분경에 마무리 되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수술이 있었지만 고생한 인턴을 데리고 병원근처 맥주집으로 가볍게 한잔하러 갔습니다. 때마침 그 자리에서 교수님을 만났고 교수님도 학부생들과 늦게까지 자리가 이어져 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교수님이 그곳에 계시는 것도 모른채 술집 내에서 배회하다가 우연치 마주쳤고 내일 아침 7시부터 수술인데 전날 새벽 2시가 다 되어가는 무렵에 그 곳에서 만났다는 사실에 웬지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와 새로 들어온 인턴을 그 자리에 부르셔서 당부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교수님은 한참을 뜸을 들이시더니 "절대 피하지 말라" 이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앞으로 구강외과 의사로 살면서 불가피하게 많은 힘든 일이 있을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피하지 말라 라는 당부의 말씀을 늦은 밤 병원앞 선술집에서 제 두눈을 보고 해주신 말씀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워낙 말씀을 아끼시는 분이시라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 시절 제가 생각했던 느낌 보다는 현재 교수님의 나이보다 지금 나이가 더 들어보니 더 크게 와 닿는 것 같습니다. 항상 소중한 환자분들이나 수술 술기들을 책상 근처에 두고 곱씹던 모습부터 한마디 해주신 말씀들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많은 교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젠 얼마후면 정년퇴직을 앞두고 계시지만 아직도 교수님 앞에서면 예전 새벽녘 머리를 조아리고 경청했던 20대 후반의 레지던트 1년차 때 모습인 저를 발견합니다. 그렇게 4년간의 수련생활과 직간접적인 모임과 학회에서의 활동들을 되뇌이면 저는 대단한 분 옆에서 오랬동안 같이 모시고 배웠단 사실만으로도 굉장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교수님의 모든것을 다 흉내낼 그릇도 안되지만 교수님이 진료때 쓰시던 어색했던 금테 안경과 비슷한 안경을 하나 장만해서 저도 수술실에 뒀습니다. 안경테라도 닮고 싶은 마음으로 그 동안의 감사함을 오마주 합니다.

오마주(hommage)
一 心 김세호
넌 있는 그대로의 완벽한 피조물
너의 행동 너의 말투 너의 몸짓
모든것이 완벽하다.
너의 움직이는 화려한 몸짓에 눈이 반응하며
너의 세련된 말투에 가슴이 떨린다.
너의 빛나는 금테안경이 광채를 발휘하며
너의 숨쉬는 모습 모든것이 향기롭다.
너의 빛나는 의지와 동행 하는 것에 숨이 벅찬다.
너의 계획에 동참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달렸다는 것만으로도
늘 가슴 떨렸다.
오늘도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나는
너와 함께 영광스러웠던 기억을 되뇌이며
너가 즐겨쓰던 금테안경을 착용하며
너를 오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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