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생각나는 글

존재(存在)

서리풀 김박사 2023. 9. 13. 12:15

 

 
책상위에 놓여있는 한다발의 대략 몇 백장이나 되어 보이는 수술 동의서에 싸인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생길 수 있는 합병증부터 감각손상등 환자분이 직접 저 동의서를 보면서 읽어 내려가는 순간에는 무시무시한 글귀들이 온 A4용지를 덮고 있습니다.

담당 간호사들의 설명을 들으시고 환자분들이 읽고 싸인하는 그 동의서를 평상시에 저는 미리 자필로 싸인을 해둡니다. 내용의 엄중성으로 보자면 좋은 만년필로 정성스레 사인을 해야 되겠지만

너무 많은 양에 질식되어 버려서인지 펜을 가볍게 잡고 빠른 속도로 한장한장 최대한 빨리 제 이름 석자와 그 위에 제 사인으로 공간을 채웁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오늘 수면 수술 환자의 간호사 오더 용지가 있습니다. 오늘 약 6개의 임플란트와 기존의 1개의 임플란트를 제거하는 수면 수술이고 꾀 큰 수술입니다.

매일 적는 내용이지만 또 다시 한번 내용을 확인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펜에다고 몸의 하중을 실어서 한자 한자 정성스레 눌러 담습니다.

기본적으로 악필이라 남들이 보기에는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제 눈에는 수술전 일종의 비장의 결의가 느껴지는 의식입니다. 수술전 안경을 고쳐쓰고 수술때 들을 음악을 선곡하며 당일 수술의 저만의 루틴 만큼이나 정성들여서 한자 한자 적습니다. 
 
오전은 큰 수술과 같이 잡혀 있는 마이너한 수술이 많이 있어서 마음이 무척 바쁩니다. 수술은 최대한 신중하게 빨리 하지만 아직 손글씨로 차팅하는 진료 기록난에는 저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휘갈겨 적습니다.

오전 마지막 수술이 끝나고 난 뒤에는 더는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기에 비어있는 앞 수술실 의자에 앉아서 한자한자 정성스레 수술 내용을 적어 봅니다. 
 
오늘 몇 명의 환자분들의 수술 후 소독과 일주일전 수술 환자분들의 실밥을 제거 하였습니다. 글씨를 보니 꾀나 흩날려 있고 상처의 소독하면서 일주일 전의 나와 마주합니다.

제가 일주일전에 그 당시 존재했던 나란 존재를 차팅에 글씨며 봉합 방법이며 방사선사진을 보면서 나란 존재와 계속 만납니다.

그 만남이 이렇게 정성들여서 잘 했구나라는 자신에 대한 칭친의 순간일 수도 있고 왜 그때 이런 판단을 했지 하는 고민의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매일 일주일 혹은 몇 일전의 저의 흔적과 마주합니다. 
 
정성스레 눌러쓴 글씨를 마주하며 그 날의 비장한 마음을 엿보고 꾀나 큰 글씨로 성의 없게 쓴 차팅을 보며 그 날의 분주함들 다시 만납니다. 한 차팅에도 다양한 글씨체가 보입니다. 매 순간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행위를 하면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한장의 종이에서 만납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존재의 흔적이 남고 있는걸 확인합니다.

예전부터 실밥을 직접 풀며 일주일전과  같은 공간에서 나를 다시 만나듯 이렇게 한 공간에서 계속 나와의 흔적을 만나면서 나의 존재를 다시한번 확인합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하였고 또 무엇에 그렇게 집중하고 또는 어떤점을  소흘히 했는지 오늘 하루하루의 존재가 쌓여 가는걸 자각하는 하루의 짧은 소회였습니다.

'살면서 생각나는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상포진(帶狀疱疹)  (2) 2023.09.22
소망 (所望)  (2) 2023.09.18
향 (香)  (0) 2023.09.01
사춘기와 돋보기  (0) 2023.08.28
믹스커피에 관한 단상  (2) 2023.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