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는 수유역 근처에서 병원 진료가 예약되어서 일찍 퇴근했습니다. 제법 진료 시간이 길어져서 들어갈때와는 다르게 해는 지고 거리에는 연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많이 나와 있습니다. 날씨는 온몸을 움츠려들게 하게끔 춥지만 밝은 표정의 젊은 사람들이 꽉찬 거리는 제가 예전에 일했던 어르신들이 많았던 청량리와는 다르게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집니다.
의정부로 향하는 큰 도로를 두고 곳곳에서 합류하는 작은 도로들, 그 사이에 빨간 신호등, 그 앞에 횡단보도의 길이에 비해 길게 늘어선 차량의 행렬이 퇴근 시간의 정점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수유역 중심부에서 약 100여미터의 거리에는 이젠 본격적인 저녁 장사를 알리듯 네온사인 간판들이 환하게 비추고 있고 인파로 늘어선 분주한 행렬사이에서 늘 그렇듯 한손에 전단지를 몇 백장씩 이상든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을 계속 마추칩니다. 제가 받아든 전단지만 순식간에 5장을 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거나 아니면 당장의 자신의 일과는 상관이 없기에 애써 외면하지만 저도 그닥 해당되지 않는 음식점 전단지와 바디 프로필이라고 적힌 헬스클럽의 전단지가 대부분이지만 애원하듯 받아 달라는 어르신의 눈빛에 주저없이 전단지를 하나씩 수집하다 보니 약 80미터 걷는 동안 제가 받아든 전단지만 족히 7장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전단지를 공손히 받고 잘 접어두었다가 보이지 않는 재활용 쓰레기장에 버리는 이유는 과거의 일종의 후유증 같은 마음의 빚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꼭 누군가에게 발각되지는 않지만 법의 접촉되지 않는 범위의 경계에서 조금은 비양심적인 잘못을 가끔은 하고 살아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모님이나 아내에게 미안한 짓도 참 많이도 했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 일은 아주 오랬동안 후회됐던 일중의 하나입니다.
1989년도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 저는 중학생으로 시내에 위치한 새로 생긴 제법 큰 학원 종합반 소속이었습니다. 원장님은 약 40대 초반의 아주 의욕적인 남자분이셨고 담당하고 계신 영어 강의도 아주 열심이시라 지금은 거의 사라진 성문 기본 종합영어를 아주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원장님은 저의 종합반 학우들 가운데 전교 10등권 이내의 학생 3명을 거론하시며 (제가 그 중 한명입니다) 학원의 hope 라며 치켜세워 주셨고 계속 칭찬도 많이 해주시고 항상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 무렵 개천절 전날쯤 학원 수업이 끝나고 늘 그렇듯 학원계단을 4층에서 1층으로 손살같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2층에 교무실이 있었는데 원장선생님이 저를 포함 3명을 부르셨습니다. 아르바이트도 할겸 학원 전단지 할당량을 주시며 내일 개천절에 이걸 다 돌리고 오면 천원을 용돈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제 하루 용돈이 300원 전후 였기에 솔깃한 제안 이었고 저는 손을 들며 적극적으로 원장님께 저의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그렇게 3명의 원생은 원장님과 약속을 하고 다음날 점심을 일찍먹고 학원앞에서 만났습니다. 각각의 할당량을 부여받고 원장님의 설명을 듣고 원평1동과 원평 2동 원평3동 각각의 집에 한장씩 우편함이나 기타 수집함에 넣는 법까지 설명을 듣고 의욕있게 출발했습니다.
개천절은 절기상으론 가을 무렵이지만 실제 한낮은 여름의 무더위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2시간여가 지나고 아직도 한참을 남은 전단지를 친구들과 바라보며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더워서 땀은 흥건했고 우리는 꾀를 내어 한번에 여러장씩도 집어넣고 했지만 그 숫자는 쉽게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너무 더워서 원평3동부터 원평 1동까지 가로지르는 방천에 앉아서 흘러가는 냇물만 다들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안되겠다 더는 못하겠다는 푸념을 다들 하기 시작했고 저희들은 치수작업을 위해 만들어진 울퉁불퉁 돌틈과 그 돌들을 단단히 묶어놓은 철사들 사이에 빈 틈으로 그 전단지를 뭉치체 누구랄것도 없이 쑤셔 넣기 시작했습니다. 약 절반의 전단지를 그 곳에 넣으며 미안함과 죄책감이 교차 했지만 당장 너무 더운 날씨는 회피하고 싶었기에 우리의 양심도 같이 전단지와 함께 그곳으로 쑤셔 넣어졌습니다.
일을 끝내고 다시 학원으로 돌아갔습니다. 원장님께 임무를 완수했다고 말씀드리고 각자 천원씩 받았습니다. 그 당시 느꼈던 미안한 감정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그 날 이후로 간혹 전단지만 보면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는 나만의 트리거가 되었기에 전단지를 나누어 주시는 분들이 저 같은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않도록 가급적 적극적으로 받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사실 전단지외에도 저는 정말 사소하게 잘못한 경우는 꾀 많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런 큰 죄책감 같은 것이 생긴 이유는 우리 3명에게 너무나 기대를 많이 하시고 성공적인 고등학교 입시를 항상 원하셨던 분에게 거짓말을 한 점이 아마도 어릴적 감성과 같이 동반되어 기억속에서 소환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2000년경 학원이 없어졌단 얘기를 듣고 그 원장님을 수소문해서 찾은 적도 있었습니다. 현재 구미 유디치과 근처인 원평동 번화가에서 약 20년전에 호프집을 하신다는 얘기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직접뵙고 그 날의 일을 사과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저희가 전단지를 버렸던 그 방천은 복개가 되어 건물이 올라가고 이젠 사라졌습니다. 저도 그 당시 구미에 살았던 여동생에게 들었습니다. 어릴적 추억이 가득했던 그 방천 고기도 잡고 멱도 감았지만 저에겐 아직도 돌틈 사이에 박혀있는 전단지가 아직도 마음속에 그대로 박혀 있습니다. 제가 죄책감을 덜기위해 십수년간 정성스레 받은 전단지의 수가 아마 그곳에 구겨놓은 숫자보다 많지 않을까 하고 혼자 자신을 위로해 봅니다. 해진 저녁 수유역4번출구에서 전단지를 보다가 떠오른 남자의 짧은 소회였습니다.
원장님이 이제 70중후반대의 정도 시겠네요. 항상 건강하시구요. 그때 보잘것 없는 저를 항상 호프라고 격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머지 두명은 지금 뭐하고 살고 있냐구요. 한명은 시청 공무원이고 한 명은 건설회사 부장님이십니다. 지금은 다들 다른 삶이라 못본지도 꾀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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